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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대 총회장 언더우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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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대 총회장 언더우드 목사

하느님으로 하다가 최종 하나님으로 택한 것은 모두 그의 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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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예루살렘교회의 세 기둥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였다면, 한국 초대교회의 언더우드 아펜젤라 마펫은 바로 주춧돌과 같은 이 땅에 교회를 개척한 3대 개척 선교사였다. 조선선교 50주년을 맞은 신학지남은 이 들 선교사들의 고마움과 불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특집호를 실었는데 거기 서두에 이런 글이 나온다.

"그들은 손을 펴서 천주(天柱)를 만지려는 의기충천의 20당년에 순교자의 정렬을 품고 대양을 건너 우리 조선에 그 피를 부은 이들이다. 그들의 뿌린 씨가 백배 천 배의 열매를 맺어 50주년을 맞는 금일에 40만 가까운 신도를 가졌으니 감사할 바 아니랴"

언더우드는 이들 중에 실지로 개척선교에 많은 공헌을 한 유일한 분이었다. 해리 로즈의 표현처럼 "개별 선교사들을 많이 한국에 오게 한 지도자"였고 스피어 박사는 "미국에 올 때마다 "선교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지칠 줄 모르는 참을 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는 일찍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화학자요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잠시 그의 집안 내력을 보면 할아버지 토마스는 독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18세기 영국과 스코트랜드 교계에 명망이 높은 알렉산더 우오 목1사의 사위였으며 직업은 의학서적 등을 간행한 출판업자로서 진실한 분이었다. 아버지 존은 역시 신앙인으로 특별히 발명의 재질이 뛰어나 인쇄용 잉크, 타자기, 묵지(리본), 안전지 등을 발명하여 영국 왕실예술원으로부터 메달과 표창을 받았던 과학자였다.

외할아버지 알렉산더 와우 박사는 런던선교회 심사위원회 위원장이며 각 교파 교단과의 연합운동을 주도하면서 웰즈교회를 시무한 장로교 목사였다.

그러고 보면 언더우드는 외조부의 연합정신과 친 할아버지의 사업수완과 아버지의 발명 재질을 겸한 만능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그의 어릴 적 시절에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언더우드는 예의 바른 소년으로 가게에 들어 설 때에는 언제나 모자를 벗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나올 때에는 모자를 놓고 나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것은 어떤 일에 공상을 하다가 현재의 입장을 잊어버린 것으로 그의 건망증을 놓고 가족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성격이 훗날 미지의 땅에 선교의 꿈을 꾸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한 번은, 언더우드가 집에서 쓸 물건을 사기 위해 5달러짜리 지폐를 들고 가게에 간 적이 있었다. 가는 도중에 다른 생각을 깊이 하면서 쥐고 있던 지폐를 한 조각 한 조각 찢어 버린 것이 가게에 거의 도착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이러한 행동을 낳은 정신구조는 훗날 그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에는 놀라운 집중력을 기울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어릴 때 그는 형제들과 같이 히브리서 전체와 시편 119편 그리고 다른 성경요절을 외우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집안에서는 가족들이 모여 성경을 읽고 교회에서는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에 그는 의자 위에 올라가 정식 예배시간과 같이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했다.

언더우드는 13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미국으로 건너가 화란교회에 등록, 장래 목사를 꿈꾸며 해스브룩 학원에 입학, 개인교수로부터 서양고전을 배웠다. 1881년 뉴욕대학교 졸업 후 뉴 부룬스위크 소재 화란개혁신학교를 84년에 졸업, 뉴욕대학교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 선교사로 갈려는 꿈을 접고 미지의 조선에 가기로 결심한 후 12월 16일 일본으로 출발했다. 도착 후 2개월 체류하는 동안 이수정과 다른 망명객들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식을 얻고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 성경을 가지고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아펜젤라 내외 등과 함께 도착했다. 어더우드는 7일에 입경한 지 3일이 되는 4월 10일부터 광혜원 의학 생들에게 물리화학을 교수하기 시작하여 그 후 31년간 조선선교를 위해 그의 땀과 눈물과 피를 쏟으며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한 후 1916년 10월 12일 향년 58세를 일기로 조선교회에 큰 업적을 남긴 채 미국 애틀랜타시에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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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준 박사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다음 8가지로 구분하여 그의 성격과 업적을 평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4가지로 줄여 서술할까 한다.

1. 선교사로서의 언더우드우리 말의 이름인 원두우 목사는 조선에 와서 다방면의 사업을 벌렸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선교사요 전도인이었다. 모든 활동은 전도사업의 보조사업으로 삼은 것이지 그것이 전업은 아니었다. 그는 경성과 소래에 교회를 처음으로 세웠고 경성과 경기서부 그리고 황해도 일대에 목사로 다년간 시무하였고 이 지방에 전도한 선교사였다.

2. 학자로서의 어더우드그는 어학에 특별히 재주가 있어서 회화설교와 교수에 조선어를 무난히 사용했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4서3경을 이용할 정도였다. 그 외 서적과 전도서류의 편찬 신문발행 성경번역을 했다. 그가 신구약 성경을 번역할 때 가장 고심한 어휘가 하나님이었다. 처음엔 신<神>을 택할까? 천주<天主>나 상제<上帝>로 할까? 교계의 변론이 많았으나 하느님으로 하다가 최종 하나님으로 택한 것은 모두 그의 공적이었다.

그리고 조선문화를 위해 조선어문법을 저술하였고 한영사전 간행 그 외에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문체와 철자법에도 그의 수고가 잘 반영되었다.

3. 교육가로서의 언더우드그가 처음으로 입국하여 광혜원의 의과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조선교육의 문을 열었는데 그 후 고아원(경신학교 전신)과 예수교학교를 세웠으며 새문안교회 부속 협성소학교를 설립, 에비슨 박사와 협력 세브란스 의학교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가 시무하는 교회마다 초등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교회사역자 양성을 위해 피어슨성경학원 설립, 원장의 일을 보았다. 평양신학교 설립에 힘썼고 교회 각 학교를 위한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하였고 사무실을 사저에 두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경성에다 최고학부를 두기 위해 서북지역 교계 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다년간 몸소 겪으면서 결국 연희전문학교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마펫과의 학교 설립 이견으로 크게 상심하여 오늘날 후손들 사이에 교류가 없을 정도로 당시는 서북파와 비서북파 사이에 충돌은 컸다.

4. 여행가로서의 언더우드그의 국내 전도여행은 1887년 10월부터 1914년까지 무려 11차에 걸쳐 강행되었는데 대체로 벽지의 교회 개척과 순회전도를 위한 것이었다. 전국을 통해 주요 지역에는 그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동경에도 여러 번 여행하였고 중국에도, 노령 해삼위에도 갔다.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유럽에 다녀왔고 인도양 바다를 거쳐 근동 각처와 성지순례를 하였고 유럽대륙을 수 차례, 미국과 카나다 각지를 순례하여 조선선교의 현황을 보고하였다. 이렇게 외국 여행을 많이 한 것은 여느 선교사들에게는 상상도할 수 없는 일로써 이 모두가 사업을 하는 형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5. 정치가로서의 언더우드그의 정치적 수완은 다른 사람의 역량 부족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데 있었다. 조선에 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사업을 하게 한 것은 바로 언더우드의 공적이었다. 이눌서 일행에게 감동을 주고 그 열렬한 청년들을 위하여 재력을 동원함으로써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그리고 카나다에 가서 카나다장로교회로 하여금 조선에 사업을 착수케 한 것도 언더우드였다

1910년에는 동료들과 협력, 조선을 홍보하기 위하여 미국 카나다 양국의 각지를 순회하여 새로운 많은 선교사들을 모집하고 근 20만 불의 거금을 후원 받아 교회 각 기관의 기초를 견고케 했다.

6. 언더우드는 또한 비범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조선교회의 근본적인 원칙이란 자립경영 토착교회 설립 교파의 연합 등인데 이 모든 것을 다 그의 연구와 노력에서 기초를 세운 것이다. 교파간의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을 확정하고 또 각 선교기관을 연합하기 위해 선교사연합회를 조직했다. 또 서해안을 순회하다가 장연군 구미포가 선교사들의 휴양지로써 최적한 줄로 알고 땅을 매입하여 별장들을 짓게 한 것이다. 주야로 전도에 노력하는 선교사들에게 휴식의 필요성을 감안한 것도 바로 그의 정치적 수완이었다.

7. 언더우드는 또 주색잡기에 허랑방탕한 조선의 청년들을 나라의 역군으로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중국과 일본의 청년회와 제휴하는 등 그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평화의 사자로서의 언더우드그가 조선에 머물던 31년간은 정치적으로 혼란과 갈등의 시기였다. 갑신정변 이후 청일전쟁, 노일전쟁, 을사조약, 한일병탄 등을 목도 했다.

그는 일찍 고종의 신망을 받던 인물로서 민비 시해 이후 고종의 신변상의 위험이 왔을 때 궁중에 들어가 전후 7주간 입궐숙직을 하였고 왕의 식탁음식에 독이 들어있는 지를 감식했다. 의친왕의 미국 유학 시에도 고종의 자문에 응하였고 그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다. 그리고 몇몇 인사들의 정치적 망명을 도왔는데 선교사로서 인도적 행동을 그 때 그때마다 과감히 보여줬다.

8. 끝으로 그는 용기의 인물이었다. 어더우드 가문에 이런 가훈이 내려 오고 있다.

"불가능을 보고 비웃어라 그러면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laughs at impossibilities and it shall be done) 이런 생활상의 표어가 물론 성경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의 생애를 사로잡았다는 것이 돋보인다. 후퇴는 없었고 항상 긍정적인 사고와 거기에다가 맑은 양심, 꾸준한 노력, 그리고 밝은 희망을 가지고 진전했기 때문에 선교의 불모지 이 땅에 그토록 찬란한 금자탑을 세울 수가 있은 것이다.

그의 용기는 신체적 고통을 참는 데도 볼 수가 있었다. 1910년 여름이었다. 장연군 구미포에 피서 차 갔다가 실족하여 발을 삐는 중상을 입었다. 그 곳엔 의료시설이 없었고 교통이 불편하였는데 상한 다리를 가지고 들것에 누어 이틀을 견디며 재령에 와서야 응급치료를 받았다. 이런 위급한 지경에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견뎌낸 것은 그의 정신적 용기가 큰 보탬이 되었다.

그는 또한 만능 탤런트였다. 박사는 자기의 능력과 정력이 미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그냥 지 내친 것이 없다. 목수, 난방장치, 건축공사, 학문으로는 신학, 문학, 법학, 철학, 자연과학을 정통하였고 의학에 있어도 직간접적으로 공헌한 바 적지 않았다. 의학생을 교수하고 그 부인의 의료사업을 후원하였고 조선학에도 또한 조예가 깊었다. 어학, 사전, 고유종교, 풍속관습, 사회제도에 남겨둔 저술이 많다.

사업에도 다방면이었다. 교회사업치고 그의 손길이 안간 데가 없다. 이처럼 다방면에 그의 수고가 가미 되어 진 만큼 그야말로 전 조선교회의 사람이었다. 한 지방에 국한되지 않고. 자기가 관계한 사업만 중시한 것이 아니라 경향의 차별이 없었고 전도, 교육, 의료사업에도 차이를 두지 아니했다. 모두 조선민족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도 사람인지라 독단적이라는 동료들의 비난도 많이 들었고 조송하다는 비판도 없지 아니 했다. 넉넉한 선교비로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부러움과 오해를 쌌지만 사실은 그 때나 오늘이나 그런 유의 비난과 비판은 늘 있어 온 것이었다. 그의 인격은 만대에 사표로 남아있고 그의 이상은 오늘 우리의 귀감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 언더우드의 기도문시 ♤    - 언더우드선교사 -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 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들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소중한 기도문을 이렇게 전합니다. 

다시금 복음의 소중함과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귀하게 떨어짐의 감사함이  배로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주님을 위한 막노동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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