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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기본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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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기본 습관

누가복음 6장 37~42절 (예정교회 설동욱 목사 설교)

1.jpg

 

사람마다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위치에서 놓고 볼 때,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단점을 정확히 알고 고치는 사람은, 비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습관을, 정당화하고,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히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이, 함께 대화가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문화 충돌입니다. 너무나 다른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백년대계라 해서 멀리 보고 큰 계획으로 움직였기에, 교육의 큰 틀이 바뀌지 않았지만, 지금은 탈바꿈이 이루어져, 모든 게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어른들의 말을 수긍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어른들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문화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도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 있게 선포해야 할 목사이기에, 나를 쳐서 복종할 때가 많습니다. 요즈음 주의 종들도 과거 우리 때와는 너무 다릅니다. 목회충돌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 부목사님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때가 많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위치에서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져야 할 무거운 짐들이 있을 것이요, 교회에서도 져야 할, 무거운 짐이 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고쳐야 할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입니다.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은,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냥 봐 줄 수 있는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키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27절-36절을 통해서 말씀하신 ‘원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의 제자로서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타인을 대할 때, ‘사랑’이 가장 우선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원수일지라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나쁜 습관을 지적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단점입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마치 자기는 의인인 것처럼, 착각하는 가장 나쁜 습관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탄의 습성이 이런 것입니다. 이런 악한 습관의 고리를 우리는 끊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고쳐야 할, 악습이라고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이, 마땅히 배워야 할 필수과목이라면, ‘남을 판단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버려야 할 “금기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이런 나쁜 버릇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를 살펴보며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판단하실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판단하실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남을 판단할 위치에 있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누구를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본문 3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간단하게 “비판”을 금하고 있습니다.

 

‘비판하다’는 말은, 문자적인 번역으로 ‘판단하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은 악과 벌을 집행하는 사법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자기 잣대로 마음대로 판단하면서, 마치 자기는 의로운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남을 판단하는 것을 못하게 “비판치 말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은 남을 판단하면, 자연히 그 사람을 정죄하게 되기 때문이요.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정죄하게 되면, ‘용서’라는 복음이 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신 관계에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믿음”이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용서라는 미덕이 없이는, 가족관계나, 친구 관계나, 이웃 관계나 할 것 없이, 어떤 관계도,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그 사람을 기피하게 됩니다. 결국 판단은 관계의 파괴를 가져옴을, 예수님이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면, 너희도 비판을 받지 않고, 정죄도 받지 않고,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지 않게 되는 어떤 공로는 아닙니다.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미 용서받은 의인은,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당연한 자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받은 의인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까닭에, 그 감격 때문에,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고,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결론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 어른이 되어서도 상대방을 사랑할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체험을 못한 사람은, 사랑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도, 사랑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결국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하고 있는 영적교만인 것입니다.

 

우리 예정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의인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실천함으로서,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이 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대인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판단이 아니라 배려입니다.

 

대인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배려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잘 베푸는 자가, 넉넉한 인생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결국 누리는 복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서 대인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본문 38절에 기록하고 있는데,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대인관계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간단명료하게 명하신 예수님께서, 그 대신 대인관계의 원칙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만날 때, 판단을 하기 보다는,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나, 함께 하는 공동체의 지체나, 함께 일을 하게 될 때나, 그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나로 인해 채워 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병든 자가 있을 때, 그 사람이 마치 잘못 살아서 병든 것처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그 사람이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줘야 합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그렇다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대신, 그가 새 힘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면서, 위로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는, 구제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베풀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사항은, 값없이 조건 없이 주어야 합니다. 당사자에게 돌려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른 손길을 통해서 반드시 갚아 주시는데,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쌀을 사면, 10킬로, 20킬로, 40킬로 이렇게 킬로로 사지만, 과거 저희가 어렸을 때는 됫박으로 팔았습니다. 쌀을 됫박으로 사면 후한 사람은 쌀을 흔들어 넘치도록 줍니다.

 

그런데 야박한 사람은 살살 펴서 대를 깎아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푸는 자에게 돌려주실 때는, 야박하게 깎아서 주는 것이 아니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해서, 돌려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헤아리는’ 것은 남에게 줄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이 남에게 주는 것으로 반드시 돌려받습니다.

 

사랑을 주면 사랑을 돌려받지만, 판단을 주면 판단으로 돌려받습니다. 비판을 주면 비판을 돌려받습니다. 이것이 심고 거두는 법칙입니다. 내가 심는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면서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남을 판단하고 비판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도, 내가 얼마나 남을 판단하고 비판했는지, 혹시라도 내가 습관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남편이 돈 못 벌어 온다고 비판하는 대신, 그 남편을 오히려 격려하고 힘을 실어준다면, 그 가정은 분명히 더 화목해지고 집안 분위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부부대화법에서 상대를 비판하기 전에, 내가 주체가 되어서 말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밤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왜 이제 와! 여태 뭐하다 이제 들어와!” 언성을 높이면서 다그치지 말고 “나 여태 당신 기다리느라 졸려서 혼났어.” 이렇게 얘기하면, 남편이 “기다리지 말고 자지 그랬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가 “당신이 걱정이 되어서 내가 어떻게 자.”이런 식으로 자신을 주체로 대화를 풀어나가면, 남편은 속으로 감동받고 일찍 들어오고 싶어집니다. 그런 아내이면 일찍 들어오게 됩니다. 혹시 늦더라고 전화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그치거나 자꾸 따지면, 남편은 자꾸 거짓말하게 되고, 아예 전화를 꺼버립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여전도회나, 남전도회에서, 누구는 열심히 봉사하는데, 누구는 하지 않는다고 비교하면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여전도회나 남전도회는, 분위기가 살벌해집니다.

 

그러나 약한 믿음의 성도라 할지라도, 오히려 다가가서 따뜻하게 권면하고, 성숙된 믿음의 본을 보여주면, 그 여전도회나, 남전도회는, 사랑이 넘치는 화기애애한 여전도회나 남전도회가 됩니다.

 

이처럼 남에게 주는 것을 습관화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끝없이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이 두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남을 함부로 내 잣대로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그야말로 내 신앙과 삶의 품격이, 모두가 존경하는, 본받고 싶은 모습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3. 남을 판단하는 눈을 내 자신을 판단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이 판단을 잘 한다는 것은, 자신감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능력을 자신을 판단하는데 사용하면, 큰 유익을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 39절- 40절을 통해, 남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딜레마를 지적했는데, 그것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39-4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제 딴에는 남의 잘못을 지적해서, 바로 잡아주려는 선한 의도에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소경이라는 데 있습니다. 똑같은 처지에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말도 별 신빙성이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또 40절에 보면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은 다릅니다. 오늘날은 수많은 컴퓨터에 내장된 정보와 책을 통해, 제자가 더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즈음 대학교수의 논문표절을 봐도, 제자들이 쓴 것을 자기가 한 것처럼, 학술지에 발표하고 있는 현실을, 매스컴을 통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는, 정보전달이 미개했기 때문에, 학생은 선생이 가르쳐주는 만큼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일 많이 배운다 할지라도, 선생님과 같을 수는 있어도, 넘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남을 판단하는 자들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모르는 사람이, 남의 선생 노릇을 하려고 하니, 결국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소경이랑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41절-42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들보’는 통나무로 건축할 때,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을 건너지르는 나무를 말합니다. 물론 통나무가 사람의 눈 속에 들어 갈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설사 자기 눈 속에 통나무가 박혀 있다 할지라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는 예배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졸면서, 눈에 통나무를 박고 있으면서, 자기 목장식구가 예배에 조금만 늦어도, 상대방의 사정은 조금도 고려치 않고, 대뜸 ‘요즘 신앙생활이 약해지는 것 같아.’라고 핀잔을 주면서, 그 교인의 티를 지적하는 사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작은 말 때문에 상대방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자기 잘못을 살피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남의 잘못을 찾는 데는 전문가들입니다. 인터넷네티즌 수사대나 악플 다는 사람들을 보면,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던지는 돌에 맞은 개구리에게는, 생사가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월권 행위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다 장차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자들이지, 심판할 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남을 정죄하기 전에,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려는 그 눈으로 자기 자신부터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고치려 하는 자를,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 뒤에, 바로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 자신도 헤아림을 도로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 사랑으로 돌아올 것이요, 용서를 베풀면 용서로 나에게 돌아올 것이요, 물질을 베풀면 물질로 나에게 돌아올 것이요, 기도를 베풀면 응답으로 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은혜받고 저와 여러분의 악한 습관의 고리를 끊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좋은 습관은 말씀을 읽는 습관과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설교 듣는 것보다 더 좋은 습관이, 말씀을 읽고 조용히 묵상하면서, 내면의 소리를 듣는 습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내면에서 말씀을 통해 만져주시는 예수님의 반응을 체험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크게 활용하고, 감추어진 여러분의 달란트는, 섬김과 나눔을 통해 빛을 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옵니다. 그날에 부끄럽지 않는 승리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늘 깨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제자로서 흔들리지 않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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