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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피조물의 삶이란? (빌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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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피조물의 삶이란? (빌 2:5-8)

14면-김안나목사(새).jpg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피조물의 삶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버리셨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죄인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활하셨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류는, 성령을 받은 후에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을 받아야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피조물의 삶〉 모든 권세 앞에 복종하는 삶으로 주어진 환경에 복종하는 삶이다. 

 

피조물의 삶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① 피조물의 삶이란 낮아지는 삶이다(마 18:4). 

② 낮아진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마 16:24). 

③ 자신을 부인하는 삶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이다(빌 2:3). 

④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은 자신을 낮추는 삶이다(빌 2:8). 

⑤ 자신을 낮추는 삶은 죄인의 친구가 되는 삶이다(눅 15:1-2). 

⑥ 죄인의 친구가 되는 삶은 죄인의 종이 되는 삶이다(마 20:26-28). 

⑦ 죄인의 종이 되는 삶은 겸손한 삶이다(벧전 5:6). 

⑧ 겸손한 삶은 순복 하는 삶이다(벧전 5:5). 

⑨ 순복 하는 삶은 대항하지 아니하는 삶이다(약 4:10). 

⑩ 대항하지 않은 삶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삶이다(갈 6:17). 

⑪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삶은 일어나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사 60:1).  

 

14면-전경 최종수정.jpg

〈고난주일 전날 밤〉

기도 시간에 성령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썼느냐?」 ‘아니요!’ 「네 손과 발에 못이 박혔느냐?」 ‘아니요!’ 「너는 옆구리에 창이 찔렸느냐?」 ‘아니요!’ 「구하라!」 라는 명령에 나는 그 순간 구하지도 못하고 한 없이 눈물을 흘리며 도리어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받은 고난도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가시 면류관을, 손과 발에 대 못을, 옆구리에 창을 구할 수 있습니까?’ 라고 기도를 드리며 한없는 눈물을 흘릴 때에, ‘주여! 주님이 하시면 그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신앙의 고백을 드리게 되었다. 

 

〈내면 치유의 과정〉 

원죄로 인한 죄의 문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다. 원죄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상처받고 성장한 내면의 쓴 뿌리의 결말을 보자. 부모님께 상처를 받고 성장한 자는 부모님의 허물을 보는 눈이 밝아져 불순종하고 대적하는 영적 상태로 성장한다. 원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녀는 부모님께 상처를 받으면 악을 악으로 이길 사탄의 힘이 성장한다. 그 결과 세상을 이기지 못하며 죄를 이기지 못하는 심령 상태에 이른다. 이와 같은 심령 상태로 성장한 자녀는 누구에게 먼저 불순종하는가? 상처를 준 대상이다. 상처를 받은 인격은 악을 악으로 이길 사탄의 힘이 성장하는 것이다. 상처를 받고 성장한 자녀는 사랑의 목마름 속에서 사랑을 추구하지만 사랑의 실패자가 되어 더 깊은 상처를 받는 인격자로 성장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의 잘못 성장한 인격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어서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어떤 역사가 이루어지는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시기에 잘못자란 인격으로 내면에 쌓아진 죄성이 깨끗해지는 역사가 이루어진다. 

 

〈광야의 시험을 받는 원인〉 

애굽의 시기에 내면의 속사람이 어떤 상처를 받으며 어떻게 성장 했는가? 성령이 임하여 나는 몇 퍼센트의 악이 제하여져 깨끗한 그릇이 되었는가? 그 결과 내면에 악을 몇 퍼센트 심고 성장 했는가? 선을 몇 퍼센트 심고 성장 했는가?의 결과에 따라 각자의 광야의 시험을 받는 퍼센트가 다르다. 광야의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하여 내면의 속사람의 인격이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몇 퍼센트의 악을 선으로 이겨야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장하는가? 깨닫자.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거듭날 때에 몇 퍼센트 상처가 치유되어 몇 퍼센트의 성령 충만함이 임하였는가의 결과로 광야의 시험을 받는 퍼센트가 다르다. 용서받은 만큼 광야의 시험을 받을 때에 선으로 악을 이겨야 내 안에 선이 쌓인다. 그 시간이 내면에 마음의 성전이 지어지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류는 시험을 받는 원인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성령의 법으로 떠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이 복이 되어야 한다. 시험을 통하여 성령의 소욕을 이루는 자는 반드시 시험이 올 때마다 자기를 부인하여 말씀의 준행자의 삶을 살 수 있다. 늘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죄의 근원을 보는 구속의 은혜로 십자가의 은총을 입어야 한다. 

 

〈피조물의 삶이 이루어지는 과정〉 

창세기 2장 17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영적 교만의 ‘죄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피조물의 삶으로 예수 안에서 안식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자 결국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죄를 전가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에서 ‘너 때문이라’고 자신의 죄의 근원을 시인하지 못하던 아담과 하와의 속성을 버리고 ‘모든 죄의 근원이 나에게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가 누구에게?〉 

누구에게나 근본 된 문제는 나에게 있다. 아담과 하와의 속성을 회개하지 못하면 사망에 이르는 삶을 살게 된다. 왜 그런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류는 하나님과 단절 된 삶으로 사탄에 지배를 받아 성장한다. 그 결과 상처를 반복으로 받으며 성장한다. 그 시간은 상처 받은 내면의 인격을 사탄이 지배를 하여 악을 악으로 이겨 내면에 악을 쌓는 삶으로 내 인격이 성장을 한다. 곧 선악간에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성장한 자는 죄와 저주아래 삶으로 번민하며, 원망하고 불평하여 상대방에게도 악을 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악을 심는 자는 악을 거두어야 하고 선을 심은 자는 선으로 거두는 복을 받는다. 

 

〈쓴 뿌리의 인격〉 

나에게 있는 쓴 뿌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어려서부터 죄의 근본 된 성격이나 아픔의 근원이 치유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상처를 받았는가? 아니면 아빠인가? 그 결과 나는 어떤 상처의 쓴 뿌리의 인격이 성장 했는가? 그렇게 성장한 나는 사춘기에 이르자 누구에게 대항하며 대적하게 되었는가? 이와 같은 상처의 쓴 뿌리의 인격을 치료받지 못하는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다. 아무리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 쳐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의 고통만이 주어진다. 부모님을 대적했던 삶은 하나님이 그 부모님의 인생보다 못하게 낮추신다. 하나님은 부모님을 대적하는 삶을 낮추신다. 그 이유는 예수 생명 안에 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의 시간들이 내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피조물의 삶을 살지 못하고 계속 이어지는 아픔을 맛보아야만 하는 고통의 시간이 주어진다. 

 

어려서 받은 내면의 상처를 누가 치유를 받을 수 있는가? 여러 가지 시험을 받을 때에 성령의 법으로 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자다. 그리고 원수 앞에 엎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시간은 하나님께 치유를 받은 자가 되어 치유하는 자로 쓰임을 받는다. 이 은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이다(요 3:5). 우리 모두에게 있는 아픔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아픔이 아니다. 다 내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아픔의 시험이 내 인생 가운데 있다면 이 말씀으로 한 단계 한 단계씩 반드시 회개하는 은총이 임해야 한다. 

 

〈욕망에 붙들린 상태〉

하나님께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시간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시간이다. 욕망에 붙들리는 시간은 사단에게 붙들리는 시간이다. 사단의 정체는 우리에게 욕망으로 생각을 지배하게 한다. 생각이 지배당하는 상태에서는 만족하며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한 생각은 사단이 내 생각을 사로잡아 결국 허상에 빠지게 하고 망각 속에 빠지게 하여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한다.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좀더’의 요구사항을 가지고 사탄의 도구가 되는 삶은 선악과 먹은 상처를 치유를 받지 못한 영적 상태이다. 

 

〈사탄에게 포로된 상태〉 인간관계에 자신을 낮추지 못하여 원망하는 시간은 사단에게 붙들린 시간이다. 피조물의 삶은 그 누구에게든지 “왜 그러냐?, “왜 이러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순종하여 악한 자에게까지라도 복종하는 삶이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삶〉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마 18:21-22). 누가 먼저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할 수 있는 자인가? 내가 먼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용서를 받은 자만이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다. 시험이 올 때 상처를 받지 않고 내가 먼저 용서 받은 자는 내면에 내 의가 내면에 쌓이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자가 된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자의 권세〉 

마 18:35)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음으로 용서를 받은 자는 누구인가? 선으로 악을 이긴 자는 자신의 잘못을 먼저 보고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치유를 받은 자다. 그 결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를 받아 원수에게 까지라도 치유자로 쓰임을 받게 된다. 피조물의 삶은 내가 먼저 용서받고 상대방을 용서하는 삶이다. 예수 안에서 새 피조물의 삶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깨닫고 내가 먼저 회개를 하자. 먼저 인류의 모든 영혼들이 눈이 밝아진 조물주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시간은 자신을 보지도 못하고 주도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의 시간이다. 이와 같은 시간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치유를 받을 수도 없고 치유자로 쓰임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내 의를 쌓는 영적 상황〉 

내 의는 내면에 쌓인 상처의 근원 때문이다. 상처를 받은 시간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시간이다. 상대방의 허물만 보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시간이 되어 죄사함의 은혜를 입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계 속에 오는 시험을 통하여 성령의 법으로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말씀으로 떠져야 한다. 그 시간에 성령의 지배에 복종을 해야 나를 부인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하나님께 용서 받은 자가 용서하는 것에는 자신의 의가 쌓이지 않는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세운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가 용서하는 삶은 내 의가 될 수 없다. 용서 받은 자가 용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세워져 관계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한 영적 상태에서는 자기의 의를 내 세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법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자는 땅에서 푼다. 그 결과 하늘에서도 풀리는 복을 받는다. 시험이 올 때 상처를 받지 않고 용서 받은 자는 내 의가 내면에 쌓이지 않는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가 상대방을 용서해야 자신의 의가 쌓이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가 용서하는 삶은 내 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용서 받은 자가 용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는 것이다.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한 영적 상태에서는 자기의 의를 내 세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 시간은 사람 앞에, 하나님 앞에 바른 변론을 통하여 용서 받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곧 성령의 지배를 받아 말씀에 순복하는 영적 은혜가 있는 자다. 

 

〈나는 용서받고 살았다〉

성령님의 간섭으로 「안나야~! 지금 나가서 성도들에게 물어 보렴!」 하는 깨달음이 와서 성도님들에게 여쭈어 보았다. ‘지금까지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시느라 힘이 들으셨지요?’ 하고 물으니, ‘다 내가 지금까지 용서하고 사느라고 힘이 들었다’고 고개를 끄덕 끄덕 하셨다. 그 뒤 어느 날 또 다시 성령의 간섭으로 「안나야~! 너 지금까지 남편을 용서하고 사느라고 힘이 들었지? 성도들을 용서하고 사느라고 힘이 들었지?」 하고 성령의 간섭을 받을 때에, 싸우고 돌아온 아이를 달래주면 ‘으앙~!’ 하고 울듯이, ‘그래요, 맞아요, 하나님! 지금까지 용서하고 사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라요’ 하고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아픔을 당하였던 모든 시간들이 다 기억이 났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또 다시 일깨움을 받게 되었다. 그 때서야 ‘내가 용서하고 살았다’는 생각의 원인은 ‘예수 밖에 있는 의인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시간은 내 자신의 죄의 근원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어 “모든 죄의 근원이 나에게 있습니다.” 라고 온전히 고백하지 못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형제를 중심에 용서하지 못한 시간은 내 자신 또한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시간은 내가 먼저 용서하였다고 하면서도 다 기억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상대방의 잘못을 기억하고 있는 시간은 용서한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나 또한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깨달음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무엇 하나 온전하지 못한 나를 알게 되었고 허물 많은 내가 지금까지 남편과 성도에게 ‘용서받고 살았습니다.’ ‘사랑 받고 살았습니다.’ ‘은혜 입고 살았습니다.’ 라고 하루 종일 기도를 하며 입술로 시인할 때에 내 안에서 감사가 터져 나왔다. 그 시간 남편에게, 성도님들에게 받았던 아픔의 근원이 치유가 되었고 기억도 되지 않았다. 우리는 내가 용서하고 지금까지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용서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용서받고 살았습니다.”라고 고백을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서로 자신이 용서하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자신의 작은 허물을 보지 못하는 시간이므로 스스로 의인이 되어 있는 시간이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한 시간이다. 

 

우리 역시 이 신앙의 단계로 자신의 죄의 근원을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는 신앙은 시험이 그쳐지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시간은 결국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시간이 되어 중심에 형제의 허물을 기억하고 용서 하지 못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과 죄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제 자신도 이 진리를 깨닫고 내 죄의 근원을 깨닫는 은혜를 입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픔의 근원도 치유 받고 남의 허물이 기억도 되지 않았다. ‘다 내 잘못이다’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는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14면-첫사랑패더.jpg

◈ 선악과 먹은 율법의 의 〈도표〉

자신의 율법의 의가 살아 있는 자는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자신의 의가 있는 자는 자신의 주관하는 율법의 의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의가 강한 자는 의분이 강한 자요, 의분이 강한 자는 내면에 상처가 가득한 자다. 상처가 가득한 자는 상처를 받는 죄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다. 상처받은 자는 자기를 알지 못하는 교만한 시간이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자는 원망, 불평하는 자다. 원망, 불평하는 자는 불순종의 영에 포로 된 자다. 곧 선악을 아는 일에 사단의 포로 된 시간이다. 첫사랑 회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으로 정죄의 영에서 해방을 받아 인간관계 복종의 삶이 이루어진다. 

 

▲ 유튜브 김안나목사 강의 참고 

 

▲ 첫사랑회복선교센타 문의 : 041) 542-8222, 010-5301-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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