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박현식의 영적 내시경 16] 성탄의 진정한 의미와 이 시대 진짜 크리스천의 모습은?

기사입력 2021.12.24 12:08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박현식 목사 새사진.jpg
    박현식 목사(한국목회임지연구소 소장)

     

    약력 : 기독교대한감리회 정회원 목사 

    중부연회 단독목회 중 

    홍보출판국 전문위원 역임 

    한국교회목회자인재풀센터 대표 

    한국교회목회자고민상담실 소장

    경력 : 감리교회에서 35년차 목회중, 첫 목회-공동묘지 앞에서 생개척(맨땅헤딩파) 

    교회개척 3회, 대교회 부목사 1회, 중소도시 단독목회, 외국인 목회, 중소기업 현장목회 등 다양하게 경험함

    저서 :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현대사회윤리방법론연구, 복음의 진수,  

    목회임지!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목회임지SOS,

    율법과 복음의 이해에 관한 연구(박사논문) 등

    성탄절의 의미를 바로 찾자


    성탄절이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탄절 하면 무슨 생각이 나는가 물어보았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백화점 세일, 선물, 구세군 자선냄비, 케이크…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탄생이 생각난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사실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탄절할 때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 본질적인 질문에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첫째,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 인생의 최대 문제는 죄의 문제이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야지 마음을 먹으면서도 그 사람 얼굴을 막상 대하면 화가 나고 용서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 받을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 나를 위해서 대신 피 흘려주시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한 사람도 없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다. 이 하나님께서 피 흘려주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어야 한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장 22절) 

     

    둘째, 마귀의 일을 멸해주시기 위해서이다. 성경에 보면 마귀의 일이 나와 있다. 특히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에 보면, 사람을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마귀의 일이다. 또 마귀가 만들어 놓은 세상 풍속(에베소서 2장 1-3절), 즉 운명, 미신, 사주팔자가 있다. 이 운명의 덫을 마귀는 사용하여 사람들의 삶을 침울하게 억압당하며 살도록 조종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한 1서 3장 8절)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여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셋째, 시험당하는 인생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다보면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고민, 아픔,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시험당하는 인생들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받으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라.” (히브리서 2장 18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받으실 수 있는 최대의 고난을 당하셨다. 육체적인 고난, 정신적인 고난, 영적인 고난을 경험하셨기에 연약한 우리 인생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이다. 2021년 성탄절, 우리 모두는 의미 없는 성탄절, 주객이 전도된 성탄절, 본질을 잃어버린 성탄절이 아니라 진정한 성탄절을 바로 찾는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해보아야 하겠다.


    진짜 크리스챤, 모양과 무늬만 크리스챤


    1. 첫 번째 이야기

     

    경기도 중소 도시에서 목회를 하는 A라는 목사가 있다. 그가 사역하는 A 교회는 장년 성도가 1,000명 가까이 모이는 중대형 교회다. 언젠가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교역자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 A목사에게 상가 지하에서 개척 교회를 섬기는 B라는 목사가 항변하는 것이다.

     

    “A 목사님, 주일, 수요예배, 새벽예배, 금요 심야 기도회 시간에 A 교회에서 대형 버스로 이 지역 구석구석을 샅샅이 다니면서 교인들을 실어 가시는데, 그러면 우리 같은 개척 교회, 작은 교회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제발 교회 버스 돌리는 일을 중단해 주셔서 저희 B 교회와 같이 열악한 환경에 있는 작은 교회들도 숨통이 틔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이 이야기를 듣던 A 목사님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한 마디 대답도 못 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던 중에 교역자 회의가 끝났다. 그 주간 주일에 A 목사는 그 교회 장로들을 위시한 중직자들을 모아놓고 교역자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B 교회 목사님, 성도님들에게 상처가 되는 것 같으니 우리가 교회 버스를 운행하면서 교인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하였다. 그 회의에 모여 있던 모든 교회 제직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해 주어서 그 다음주일부터는 A 교회는 버스를 돌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2. 두 번째 이야기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동업을 하게 되었다. A는 신자이고 B는 불신자이다. 두 사람이 동업을 하면서 만약 수익이 나면 1:1 로 공평하게 나누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사업은 점점 번창하게 되어 수익을 많이 내게 되었다. 어느 날 B가 A를 찾아와 이러한 부탁을 하였다.

     

    “A사장, 내가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를 하게 되었네. 우리가 수익이 나면 절반 씩 나누어 갖기로 했지만, 지금 내 사정이 말이 아니네. 전에 내가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서 빚이 눈 덩이 같이 불어나 그 빚을 갚을 길이 너무나도 막막하구만. 내 형편이 조금 나아질 때까지만 이라도 배려를 해줄 수 있겠나. 자네는 자네 말고도 부인이 직장 생활을 해서 나보다 형편이 낫다고 생각되니 내가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만 수익을 내가 60%, 자네가 40% 가져가면 안 되겠나?”

     

    이 A라는 사람이 필자를 찾아와서, “목사님, 그 친구가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친구가 원래 약속한 대로 수익을 반씩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말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물론 그렇게도 이야기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정말로 예수님의 정신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단하는 문제입니다.” 하고 대답해 주었다.

     

    앞서 이야기한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들의 삶의 전 영역에서 순간순간 신앙인으로서의 결단을 요구받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또 우리들의 교회가 머리 끝 부터 발 끝 까지 예수님의 정신과 가치관으로 체질화된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모양과 무늬만 크리스천으로 삶을 영위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귀를 기울여보자. 이것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진정한 크리스천답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자. 


    사랑하면 전체가 보인다


    얼마 전 서울 상도동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와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대화 가운데 아주 인상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 친구 목사가 섬기는 교회에 어느 날부터인가 한 젊은 여성이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여성은 거의 매주 양로원에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한 분 한 분 모시고 와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서 그 분들의 성경 찬송도 찾아드리고, 마치 친 부모님을 모시는 자녀와 같이 사랑의 마음으로 노인들을 대접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성이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새벽 기도회 시간에 처음 나와서 기도를 하는데,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난 후 전 교인들이 개인 기도를 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이 여성이 예배당이 떠나가도록 큰 목청으로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여성에게는 다른 기도의 내용은 전혀 없고 ‘오직 아버지! 아버지!’를 수백 번 절규하면서 부르는 것이었다. 예배당에 와서 조용히 기도하려고 했던 많은 교우들이 놀라서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그 새벽 기도회 시간에 일어난 것이다. 

     

    이 목사는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교회 중직자들을 위시한 많은 성도들이 항의 전화를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여성을 제재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날 저녁, 이 목사는 여성이 직장에서 퇴근하는 시간에 만나서 “오늘 당신은 왜 새벽 기도회 시간에 그렇게 통곡했습니까?” 하고 자초지정을 물어보았다. 그녀의 대답 왈, “목사님 저는 이제까지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제 부모님이 저를 낳자마자 저를 그곳에 버렸기 때문에, 저는 그분들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어디에 사시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롭던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세상 적으로는 내가 고아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씀에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그만 오늘 새벽 기도회 시간에 다른 기도는 전혀 못하고 아버지 이름만 부르면서 감정을 주체치 못해 절규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성의 사연을 들은 목사는 그녀의 아픔과 성장배경, 모든 것이 이해되면서 앞으로도 전혀 걱정하지 말고,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마음껏 기도하라고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그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조용한 새벽 기도회를 깨며 그 여성이 절규하는 삶의 한 단편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가 나고 혼을 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성이 지금까지 겪어왔던 고아로서의 아픔과 상처, 그 속에서 새벽 기도회 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전체의 배경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이해가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현장은 어떠한가? 우리 서로 서로가 상대방의 한 부분만을 바라보면서 내 잣대로 그들을 쉽게 정죄하고 비판하고 배척하는 모습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정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보든, 사건과 사물을 보든지 간에 부분만을 보고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히는 우를 범치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것의 전체를 바라보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자. 


    떠벌리고 하느냐, 은밀하게 하느냐


    1. 첫 번째 이야기

     

    얼마 전 필자는 한 고아원 원장과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고아원 원장이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목사님, 고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 어느 때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명절 때가 아닐까요? 그 때 더 외롭다고 느끼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지만, 그보다 더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고아원에 위문 온 사람들이 고아들과 사진을 찍자고 할 때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 고아원에 선물을 가지고 위문을 오는 사람들은 거의 종교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고아들과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이렇게 좋은 일을 한다.’,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이 많다.’ 이 점을 홍보하기 위해서, 또 자신들의 종교단체 회보에 내기 위해서 사진을 찍자는 겁니다. 이럴 때 고아들은 웃고 싶지 않은데도,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인위적으로 연출하면서 사진을 찍으라고 하니까 그 시간이 제일 싫게 된 겁니다.”


    2. 두 번째 이야기

     

    필자와 친분 관계가 있는 연세가 70을 훌쩍 뛰어 넘는 노 권사가 한 분 있다. 얼마 전 부군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부군이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서 많은 보험금을 타게 되었다. 이 보험금을 수령한 노 권사는 ‘남편의 생명을 주고 바꾼 돈인데,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게 사용해야 되겠다.’ 마음먹고 그 사용 용도를 하나님께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전라도의 작은 섬에서 사명감에 불타는 목회자가 그 곳에 교회를 개척하고 열심히 섬 주민들을 전도하면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노 권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섬 주민들에게 복음을 마음껏 증거할 수 있는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그 보험금을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자신이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한 경위를 설명하고 섬 교회 예배당 건축에 보험금 전액을 헌금하였다. 몇 달 후, 이 전라도 섬 교회 예배당 봉헌예배가 있게 되었고, 담임목사는 이 노 권사에게 가장 크게 헌신한 분이 바로 권사님이니 봉헌예배에 같이 참석하자고 권면하였다. 이 때 이 노 권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목사님, 저는 아무래도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면 모두가 다 섭섭해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에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만에 하나 제 이름이 부각되면 절대로 안됩니다.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린 것입니다.” 필자는 이 노 권사의 성숙한 신앙의 모습에 콧등이 찡하는 감동을 진하게 느꼈다.

     

    앞서 말한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적으로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은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했을 때 너무나 그것을 자랑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우리 안에 꿈틀거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간 예수님의 산상 설교 말씀 중에서 마태복음 6장 1절-18절의 내용이 떠오른다. 이 말씀의 핵심 포인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 6장 3절 말씀 중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라는 구절이 계속 메아리쳐 온다.

     

    네이버 카페 한국목회임지연구소 검색 

    phs2491@naver.com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