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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전국부흥단 44년, 역사와 발자취

기사입력 2021.12.28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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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규 목사(서광교회, 31대 부흥단장)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 4:17).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막1:15) 회개 없는 교회부흥과 성령의 역사는 논할 수 없다.


    다는 아니지만 처음부터 성회는 축제이어야 한다 하여 고취된 감정 분위기로 이끌어 부흥회의 일정과 함께 끝나는 연례적인 행사성에 머무르는 부흥회의 문제점(부흥사의 자질, 부흥회의 목적, 교인의 기대와 참여도)을 제기하면서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출발인 원산집회를 중심으로 한국감리교회 부흥운동의 근원과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원산에서의 집회


    1903년 원산에서 중국인과 똑같은 방법으로 생활을 하며 구령에 불타 많은 성과를 올리는 중국 주재 미국인 감리교선교사 화이트(M.C White)양을 강사로 감리교 선교사들이 1주일간의 사경회에서 기도와 성경 연구 중 하디(R.A Hardie)목사의 회개가 일어났다.


    하디 선교사는 “너희는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3)라는 말씀에 특별한 감명을 받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신앙으로 중생의 체험과 은사를 받고 붉은 벽돌집에서 외국문화 수준 그대로의 생활을 선교지 한국에서까지 계속하는 선교사들의 문화적 교만이 한국 교인과의 거리감을 만들어 한국교회 부흥을 막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한국 사람을 사랑하느냐! 사랑 없는 선교는 교회부흥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회개하고 그의 간증문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3년동안 (1901~1903) 지경터에서 열심히 일하였으나 실패는 무엇보다 좌절이었다.하나님은 겸손하게 만들어 주신다. 공개적으로 동료들이 같이 통회 자백하고 다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고백하므로 새로운 부흥이 일기 시작했다.”


    *평양에서의 집회


    1906년 8월 하디 목사를 강사로 평양에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연합집회를 열었다. 요한1서를 공부하였으며 여기에서 일어난 회개의 역사는 통회 자복을 고백하는 간증으로 한국 교인들에게 번져 비로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다.


    천국은 회개하는 자에게 경험된다(마3:2, 4:17), 회개는 복음을 믿음에 있어서의 전제적인 사건이다.(막1:15, 눅24:47) 회개는 죄사함을 받게하는 행동이다.(막1:4),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행2:38)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행1:8). 그리하여 계속적인 회개와 신앙부흥이 일어난다(행2:41)

    이러한 부흥운동이 비운의 나라에 소망을 주었다. 그러므로 정치적 불안과 부패와 경제위기, 사회적 무질서, 도덕성의 타락 속에서도 희망과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교회로서의 정신적 각성과 애국심의 고취, 민족의 단결, 심적 평화를 줄 수 있는 교회로 재출발의 부흥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므로 기복 신앙에서 벗어나, 기독교 종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자기주의가 아닌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목회자만의 사경 부흥회가 필요하다.


    *장대현교회에서의 집회


    1903년 원산을 기점으로하여 1906년 평양에서의 회개와 성령충만, 그리고 구원받은 기쁨, 구령열의 바람으로 1907년 1월 6일 신년 벽두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합동 대 사경회를 10일 동안 개최하였다. 이 때에 남자만 1,500명이 모였고 여인들은 들어갈 틈이 없어 밖에서 창틈으로 넘겨다 보면서 설교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의 목회자들도 함께 참석하여 밤새워 기도하였고 토요일 밤에 성령충만을 받아 ‘사람의 결핍’을 통회 자복하며 목사와 장로가 서로 용서하였다. 회개는 기독교인의 용기요,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예수님은 이 때문에 오시었다.


    한국에서 부흥운동의 효과는 참으로 훌륭하다. 교회의 신앙 수준은 더욱 높아졌고 미리 자세한 성경교육이 있었으므로 광신은 거의 없었고 정신이상 같은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 열매로 1) 기독교 신앙이 비로서 한국 땅에 고착되었다. 2) 한국인과 선교사의 더 좋은 관계가 성립되었다. 3) 한국적 신앙 풍습이 확산되었다.(새벽기도회, 개인전도, 부흥회)이것이 한국교회의 초창기에 성령의 역사와 회개로 인한 부흥운동의 결과이다.


    한국 감리교전국부흥단의 역사와 활동한 부흥사들을 더 잘 알기 위해 자료집을 찾아보니 3대 부흥사로는 첫째로 하디 선교사가 1903년에 원산에서부터 부흥의 불을 지폈으며. 두 번째로는 현순이라는 분이 토착적 성령체험과 주체적 애국, 애족 부흥사였다. 세 번째로는 이용도 목사로 예수를 지극히 사랑한 부흥사로 활동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동안 부흥단을 이끌어 온 분들은 누구나 알만한 거목들이었다. 처음시작은 1972년 ‘한국감리교회 부흥단’이라는 이름으로 초대단장에 김성남 목사께서 선출되어 일하셨고. 그 후에 ‘감리교전국부흥단’ 으로 재편되어 1977년에 구본흥 목사께서 초대 단장으로 선출 되신 후 금년에 44대 대표단장까지 이르게 되었다. 


    1대:구본흥, 2대:이석주, 3대:곽전태, 4대:배동윤, 5대:고용봉, 6대:장광영, 7대:이호문, 8대:고달삼 9대:이종수, 10대:김우영, 11대:전택수 .12대:이운식, 13대:백문현, 14대:한양희, 15대:김평우, 16대:김국도, 17대:이승호, 18대:이민구, 19대:천상홍, 20대: 박기창, 21대:박상혁, 22대:전찬영, 23대:손학풍, 24대:김승현, 25대:전명구, 26대:심원보, 27대:서정달, 28대:임복만, 29대:현인섭, 30대:김종호, 31대:전태규, 32대:임홍만, 33대:전용범, 34대:최승균, 35대:박희권, 36대:김철한, 37대:최병현, 38대:양명환, 39대:김헌수, 40대:박봉순, 41대:이길윤, 42대:오영복, 43대:허달원, 44대:김형태 현, 대표단장에 이르렀다.

    특이한 점은 1) 부흥단장 가운데 감리교 최고의 수장인 감독이 많이 나왔다. 아마도 부흥회를 인도하니 유명세도 붙고 또한 인맥이 두터워 진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감독을 하기 전 부흥단장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감독이 되면 부흥단을 떠나는 일이 있었으나 김철한 단장 이후부터는 감독을 마친 후에도 행정과 영성이 다름을 깨닫고 부흥단장을 준비하는 이들 또한 많다.


    2) 부흥단에도 2세들의 활동이 눈에 띄인다. 한세대는 가고 한세대가 오나 땅은 영원히 그대로 서 있다고 하였다. 수년간 사무총장을 맡아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 이홍원 목사는 2대 단장을 지낸 이석주 목사의 아들이다. 그 외에도 여러 단원이 부흥단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3) 부흥단 중점적인 연례행사는 ‘여름연합산상성회’다. 여름이 끝나기 전 목사, 사모, 평신도가 여주구로중앙수련원에 모여 매년 큰 집회를 27대 단장 때 까지 해오다가 수련원이 매각되면서 양평대한수도원으로 옮겨 실시해 왔으나 최근 코로나19가 오면서 연합집회를 모일수 없으므로 권역별 지역성회로 그 명맥을 유지해 옴이 아쉽다.


    나는 요즘 역사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뿌리깊은 나무가 흔들리지 않듯 수많은 부흥단원들이 곁에서 담쟁이 넝쿨이 되어주니 큰 일을 감당한다. 이것이 부흥단의 자랑이요 또한 자산이다. 


    필자는 14회 총회 때 부흥단에 입단하여 31대 부흥단장으로 일을 하였다. 수많은 세월을 부흥단과 함께 지내왔기에 많은 애정이 간다. 금번 부흥단의 역사와 발자취를 남기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부족한 글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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