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한국 최초 고아원 ‘경천애인사 아동원’ 설립자 이상촌 장시화 목사 107세 생일기념 추모예식

기사입력 2023.07.05 15:35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정상문 목사 ‘임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제하 설교
    민경삼 목사 ‘경천애인사·용산감리교회·장시화 목사’ 회고사
    장성 목사 ‘백과성경전서’ 증여식 및 답사

    1.jpg

     

    지난 6월 2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용산감리교회(담임 민경삼 목사)에서 한국 최초 고아원 ‘경천애인사 아동원’ 설립자인 이상촌 장시화 목사(용산감리교회 공동창립목사 및 제5대 담임목사) 107세 생일기념 추모예식이 드려졌다.


    이날 추모예식은 장성 목사(새누리교회 위임, 예장(개혁) 부총회장)의 사회로 조정환 목사(수원 헤브론교회 담임, 뉴스앤홀리파워 발행인 겸 편집인)의 기도, 전명희 안사(새누리교회)의 특송, 최미선 안사(새누리교회)의 행장소개, 민경삼 목사(용산감리교회)의 ‘경천애인사‧용산감리교회‧장시화 목사’ 회고사, 사회자의 시 1:3절 성경봉독 후에 정상문 목사(예장(개혁) 총회장)가 ‘임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제하로 말씀을 선포했다.

     

    2.jpg


    이어 장성 목사는 부친 장시화 목사가 출간했던 ‘백과성경전서’ 1권씩을 정상문 목사‧민경삼 목사‧조정환 목사에게 선물했다. 가족대표로 장성 목사가 답사와 광고 후에 이성환 목사(수원 한사랑교회 원로)의 축도로 추도예식을 은혜 가운데 마쳤다. 제2부 ‘경천애인사 아동원 터 안내판’을 현장에서 둘러보고, 기념촬영을 한 후 제3부로 오찬 및 다담의 교제를 나누었다.


    3.jpg
    오른쪽 장성 목사가 정상문 목사에게 '백과성경전서' 전달

     

    장성 목사는 “오늘 추모예식에 함께한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에게 크신 은혜를 주시길 바라옵고, 용산감리교회가 더 크게 부흥하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하는 일에 쓰임받게 하옵시고, 교우들은 구원의 확신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경천애인사(敬天愛人社). 6·25 당시 500여명의 전쟁고아가 거쳐간 생존의 터전이었으나 3년 만에 갑자기 문을 닫았다. 주간조선 기사 ‘6·25 고아원 경천애인사의 영웅들’에 등장한 영웅은 여럿이다. 경천애인사를 만든 장시화 목사, 이곳으로 200명의 고아를 데리고 온 장홍기씨(장혁 청와대 국방비서관 아버지), 물질적으로 후원을 해준 전쟁영웅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 그중 장홍기씨와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고, 김영옥 대령의 역할은 재미언론인 한우성씨가 쓴 전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북스토리)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경천애인사 창설의 주역인 장시화 목사의 이야기는 큰 여백으로 남아 있었다. 장홍기씨로부터 들은 장시화 목사는 그가 소설가이자 계몽운동가였고, 목사이자 언론인이었다는 것이다.

     

    4.jpg
    한국최초 고아원 경천애인사 아동원 설립자 이상촌 장시화 목사

     

    장시화 목사(1916년 6월 23일~1992년 12월 17일). 그는 농촌 계몽운동의 선구자이자 ‘기독교신문’ 발행인이었고, 사단법인 경천애인사의 대표였다. 농촌계몽소설 ‘촌(村)’을 쓴 작가였고, 한국 최초의 주석성경인 ‘백과성경전서’를 편찬한 목회자이기도 했다. 미 국무부 초청으로 1967년 유학길에 오른 그는 미국 LA에서 ‘한미연합신문’(교민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신문)을 창간했다.


    철원에서 자란 장시화 목사는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작은 마을 한 곳을 정해 그곳에서 ‘이상촌 운동’을 펼쳤다. 새마을운동의 원형이 되는 사회복지사업이다. 이상촌(理想村)은 그의 아호이기도 하다. 그때의 철학과 활동은 장편소설 ‘촌(村)’에 녹였다. 이 소설은 국회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소설 ‘촌’과 장시화 목사의 이상촌 운동은 여러 사람을 감화시켰다. 노양근(1900~?) 작가도 그중 한 명이다.

     

    5.jpg
    정상문 목사(설교)

     

    노양근 작가는 장시화 목사를 모델로 소설 ‘열세 동무’를 썼다. 노 작가는 가난한 농촌 마을을 부흥시키려는 소년 장시화에게서 큰 감명을 받아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주인공 이름을 장시환으로 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7월 1일부터 8월 말까지 ‘동아일보’에 47회에 걸쳐 연재된 소설은 동아일보가 정간당하면서 중단됐다. 연재 당시 독자의 사랑을 받아 1940년, 1960년 두 차례 걸쳐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현재에도 어린이도서 ‘열세 동무’(창작과비평사)로 판매 중이다. 이 작품은 소재와 주제, 전개 방식이 1930년대 발표된 이광수의 ‘흙’이나 심훈의 ‘상록수’에 필적할 만하다고 얘기된다. 이 두 작품이 선각자적 지식인의 농촌 계몽운동이라면, ‘촌’과 ‘열세 동무’는 농촌 안에서 시작된 농촌 계몽운동이라는 데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6.jpg


    선각자이자 개척자였던 장시화 목사는 평생 이웃과 조국을 위해 힘썼다. 이상촌(理想村) 장시화(張時華) 목사는 용산감리교회 공동창립목사 및 제5대 담임목사, 『경천애인사 아동원』의 설립자, 『하나님 성호(聖號)에 대한 제의서(1948)』의 제출자, 한국 최초의 주석성경인 『백과성경전서(1965)』의 저자, 『세계복음화대성회(1980)』의 주창자 및 국제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런 면면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장성 목사는 “아버지의 일대기를 살려내는 것이 아들로서의 임무”라고 말했다. 장성 목사는 아버지를 따라 1960년대에 미국 길에 올라 내내 미국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20여년 전, 한국에 돌아왔다. 본인과 이름이 같은 증조부의 유언 때문이다. 그의 증조부는 조국의 험난한 미래를 예견했는지 “가문의 씨 하나는 한국에 남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