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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복되고 지혜로운 선택을 위한 도움이 필요하다삶을 디자인하는 선택오인숙 지음/규장 펴냄/200쪽 세월은 지혜를 품고 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지나며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저자에게서는 여러 지혜들이 엿보인다. 그녀가 이번에는 ‘선택’에 대해 나눈다. 선택은 삶의 방향을 바꾼다. 어제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오늘을 만들었고, 오늘의 선택들이 모여 내일을 만들어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제의 선택을 후회하느라 오늘 새롭게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들을 무심히 떠나보내며 ‘운명’을 말한다. 운명적으로 주어진 삶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이다. 저자는 이런 우리에게 아직 운명을 바꿀 선택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그 선택들을 격려하며,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선택으로 더욱 복되기를 바란다. 때론 잘못한 선택을 통해서도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알아가며 다른 이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고 위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아시며 인도자 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길 권면한다. 저자는 본문에서 “우리는 선택으로 인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만약 잘못했던 선택을 지울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지우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내 삶이 한 폭의 피륙이라면 내가 선택했던 좋은 선택과 좋지 않았던 선택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내 삶의 무늬를 짜온 것 아니겠습니까? 지우고 싶은 선택이라고 빼버린다면 내 삶이 무미건조해질 것만 같았습니다.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고 상처도 있겠지만, 그런 선택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알아가기도 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선택의 지혜도 배우는 게 아닐까요? 우리의 선택이 복되고 지혜로우려면, 모든 것을 아시며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그 선택에 지혜와 평강이 있기를바랍니다.“라고 전한다. 저자는 오인숙 교수는 우촌초등학교 교장, 영화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저자는 연세대학교 사회교육원 등에서 강의했으며, 한국 학교상담학회 초등상담위원장을 지냈다. 현재는 기독교치유상담교육연구원 교수, 한국스트레스협회 이사, 극단 ‘BeYou’ 이사 등으로 섬긴다. 교사 시절 문화교육부 장관상(학습지도부문)을 수상했으며, 국정교과서 집필 및 심의위원이었다. 강릉교대와 서울교대에서 교육학을, 감리교협성신학대학에서 목회학을 공부했고,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 석사학위, Midwest University에서 Christian Counseling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나님 자녀 교육》, 《힘들면, 기대렴》, 《아프면, 울어》,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등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저서가 40여 권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하며 《천국 어린이 그림동화 시리즈》, 《영혼의 빛깔》, 《날고 싶은 나무》 외 여러 책들의 그림을 그렸고, 이 책에 수록된 그림들도 저자가 글의 내용에 맞춰 직접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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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항아리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을 만나러 나갔다. 그녀가 투병중이라 걱정을 하며 나갔는데 의외로 이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고 활기찼다. 그녀는 요즘 행복하다고 했다. 투병 중이고 부요했던 환경이 갑자기 너무 어려워졌다고 하면서도 그녀는 편안하다고 했다. 오히려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고 했다. 돈이 있고 건강했을 때는 다툼이 많았는데, 요즘은 부부가 다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여섯 개의 항아리’ 이야기를 깨닫게 된 것 같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왕의 이발사가 있었다. 이 이발사는 항상 즐거운 얼굴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다. 왕도 부러워 할 즐거운 얼굴로 휘파람을 불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던 이발사가 여섯개의 항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항아리 안에는 황금이 들어 있었다. 뜻밖의 행운에 이발사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는 더 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섯 개의 항아리에는 황금이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여섯 번째 항아리는 황금이 반만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발사는 계속 반만 채워진 항아리에 신경이 쓰였다. 채워지지 않은 반을 채우지 않으면 만족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황금이 가득 채워진 다섯 항아리는 보지 않고 날마다 반만 채워진 여섯째 항아리만 들여다보며 어떻게 하면 이 항아리를 황금으로 다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휘파람을 불던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불행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어느 날 왕은 이발사의 초라해진 몰골을 보더니 “자네도 나처럼 여섯 번째 항아리를 가지게 된 모양이군”이라고 말했다. 채워지지 않은 여섯 번째 항아리는 인간의 욕구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것, 그 욕구로 인해 이미 가득 채워진 소중한 다섯 개의 항아리를 볼 수 없고 만족할 수도 없도록 하는 것, 우리가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 소유이든 권력이든 욕구라 이름 붙여지면 여섯 번째 항아리처럼 채워질 수가 없는 게 아닐까? 나의 지인인 그녀는 여섯 번째 항아리의 비밀을 체험한 것 같았다. 그래서 채우려 애썼던 여섯 번째 항아리에서 눈을 떼고 다섯 개의 항아리에서 행복을 찾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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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찾기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동생이 어려운 문제가 있어 귀국을 했다.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는 동생은 흔히 말하는 우리나라 대기업인 갑의 횡포에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그 문제를 싸들고 들어왔다. 어떤 위로의 말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 안타깝고 마음이 무거웠는데, 어느 날 동생이 우리 집 아파트 창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참 아름답다”고 말했다. 아파트 놀이터 주변에 곱게 든 단풍을 보며 말한 것이다. 동생은 어려운 투쟁의 상황에 지쳐 있었음에도 단풍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면 놀이터의 단풍을 내려다보면서 날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그 모습에 경이감을 느끼고, 길을 걷다가 보는 담쟁이 넝쿨,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세상이 아름답게 여겨지고 힐링이 된다고 말했다.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동생이 감동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고대 유럽 신화에는 고래도 춤추게 하는 뛰어난 악사의 이야기가 있다. 악사는 외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엄청난 상금을 타게 된다. 배를 타고 귀국하던 중 상금을 노린 뱃사공들에 의해 바다에 수장될 뻔 했으나 살아나게 되었다. 붙잡힌 뱃사공들은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악사의 간청으로 사형은 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형보다 더한 최악의 벌이 떨어지는데, 그것은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감동을 느낄 수 없기를!’이라는 저주였다. 아름다움을, 감동을 느낄 수 없다면 삶은 그저 생존일 뿐이다. 성경의 첫 장은 감동으로 시작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연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감동하셨다. 첫 사람 아담도 하와를 보고 감동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그 감동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지고 있는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워 지쳐 있는 이들, 이 가을에 잠시 비켜서서 하늘을 보자. 그리고 제 삶의 빛을 아름다움으로 토해내는 단풍든 나무를 보자. 기어가는 삶이 힘겨워 서로 서로 엉겨가며 담을 덮는 담쟁이를 보자.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을 느껴보자. 당신에게 감동을 주는 이 계절을 놓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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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사 아저씨의 이야기택시를 탔다. 차 안이 정결했다. 중년의 기사도 단정한 차림새였다. 목적지를 이야기했더니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요즘은 기사 마음대로 가서는 안 되고 꼭 손님이 가자는 길로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택시를 탔는데 행선지가 조금 멀면 운전기사의 인생스토리를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날 운전기사는 자신이 택시운전을하게 된지 7개월이 되었다고 했다. 30년이 넘게 은행에 다니다가 사표를 내고 운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드 판매 실적을 내야 하는데, 무슨 일이건 실적으로 압박하는 통에 그 스트레스로 가슴이 턱턱 막히곤 했다고 했다. 출근하기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그래도 처자식 먹여 살리자는 마음으로 30년을 넘게 참았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정말 잘나가던 같은 직종의 친구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고 한다. 반신불수가 되어 말도 못하고 누워 있는 친구를 보니, 마치 자기가 그 자리에 누워 있는 것 같아서 사표를 내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실적 위주의 한국에서는 참 살기 힘들다고, 자신은 요즘 운전을 하면서 너무 편하고 좋다고 했다. 그는 실적 위주의 상황에서 벗어난 자유를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개인택시 기사를 하기 위해 실적을 올리려고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지역에서 손님들이 택시를 잘 타는지를 파악하기도 하고, 손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을 돌고 또 돈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실적 위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차이점은 분명하다. 이전에는 상황에 끌려 다녔지만 이제는 자신이 상황을 끌고 다니기 때문에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다행히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자식들도 다 키웠고 그런대로 살 만하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온갖 스트레스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에게 직장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해보면서 긍정적인 관점을 바꾸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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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와 황금칙칙한 옷을 벗어버리고 산뜻한 옷차림으로 만난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돌멩이’가 화제가 되었다. 새로 세워지고 있는 병원에서 홍보실장을 맡고 있는 입담 좋은 P씨가 돌멩이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이다. 넉넉지 않은 자금으로 대형 병원을 설립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기초 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파고 토목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흙을 파내니 그 아래가 완전히 돌밭이었다. 돌을 캐내서 가져다버려야 하는데, 예상치 못했던 일에 예산의배가 되는 돈이 필요하게 되어 모두 낙담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돌덩이가 재앙이 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곧 그 돌들이 황금이 되었다. 건축하는 사람들과 조경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돌이 나오는 대로 비싼 값에 사 가는 바람에 오히려 돈 한 푼 안들이고 토목 공사를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황금이 된 돌멩이 이야기를 들으며 그 병원의 행운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사촌이 땅을 산 셈이라 약간 배가 아프기도 했다. ‘나한테는 왜 그런 행운이 안 생기는 거야?’ 하고 심기가 불편하기도 했다. 결국 돌멩이가 없다고 한탄을 한 것이다. 쓸모없는 재앙덩어리였던 돌멩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불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을 가로막는 돌멩이 하나, 인생길에서 넘어지게 하는 돌멩이 하나, 가슴을 때려 멍들게 하는 돌멩이 하나, 안 가져본 사람이 있겠는가? 문제는 돌멩이가 우리 삶에 고통이나 재앙으로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황금으로 변하지 못하고돌멩이로 묻혀 장애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돌멩이를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비결이 있었다. 돌멩이를 재앙덩어리로 보지 않고 보물로 본 ‘눈’이다. 모두들 돌멩이를 재앙덩어리, 공사를 방해하는 장애 요소로 보고 낙담하고 있을때, 그것을 쓸모 있고 꼭 필요하며 행운이 될 수 있다고 본 시각이다. 인생길에서 나를 낙담시켰던 무수한 돌멩이들을 은혜의 시각으로 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돌멩이가 내 삶의 황금이 되는것 아닌가. 이제 막 싹을 띄우기 시작한 봄 길을 지나 집으로돌아온 어느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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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질문을 하며 산다인간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살아간다고 한다. 자신에게 하는 그 질문에 따라 삶이 힘들어지기도 하고 삶이 견딜만해지거나 즐거워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다는 거야?’ ‘나는 왜 꼭 저런 인간만 만나는 거지?’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내 인생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면서 사람들은 우울해지기도 하고 체념의 삶을 살기도 한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수밖에 없었던 환자들이 있었다. 심한 부상으로 몸의 한 기능을 잃은 환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하필이면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인생은 왜 이렇게 불공평 한 거야? 이렇게 살면 뭐해?’라는 질문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전혀 다른 질문을 자신에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진정한 내 모습은 무엇일까? 내가 내 몸에만 의존하고 있었던가, 아니면 그 이상의 것에 의존하고 있었던가?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했고, 온몸의 부상으로 신체 기능을 절반을 잃었음에도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몸의 부상뿐이겠는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왜 나만 불행한 거야?’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불행을 부르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하나님은 왜 나에게 혹독하신 거 야?’라는 질문을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명히 선한 의도가 있지 않으실까?’라는 질문으로 다시 삶을 붙들어보면 어떨까?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이에 유명한 컨설턴트인 앤서니 라빈스(Anthony Robbins)는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가치 있는 질문을 꾸준히 던지라”고 조언한다. 자, 이제는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있나 의식해볼 필요가 있다. 긍정적인 질문으로 나를 북돋어주어야 한다. ‘그래도 이만하면 잘살고 있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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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작은 꿈을 잡을 때그 분이 작은 엽서 한 장으로 전 국민에게 전도하겠다고 하셨을 때, 나는 엽서 한 장의 위력을 의심했다. 그러나 장로님은 밥 먹을 때도 세수할 때도 ‘전도, 전도’ 하시다가 받은 꿈이니, 반드시 그리될 것을 믿는다고 하셨다. 작은 엽서 한 장에 그 분은 꿈을 실으셨다. 전도지를 만드는 일에 동참해 밤을 새우면서도 나는 전국의 각 교회마다 《이슬비 전도 편지》가 전도의 부흥을 일으키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었다. 몇 년 후 여든의 장로님은 또 꿈을 말씀하셨다. ‘성경암송학교’를 하시겠다는 거였다. 이 나라 아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육성시킬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암송시키는 일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게 될까?’ 나는 또 별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성경학교에 다녀왔다. 젊은 엄마들과 아이들이 성경을 열심히 암송하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성경을 줄줄 암송하고 엄마들이 눈을 반짝이며 대단한 열정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아기를 잉태하고 성경 암송을 하며 출산한 엄마들이 천 명이 넘는다고 했다. 장로님은 성경태교로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나 주의 일꾼이 될 꿈을 꾸시면서 너무 행복해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꾼다. 아주 큰 꿈을 꾼다. 그런데 내 주위에 꿈을 이룬 사람들은 우리가 관심도 갖지 않는, 어찌 보면 하찮은 꿈을, 아니면 굴러다니는 돌멩이같이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꿈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다. 아주 볼품없는 작은 꿈을 크게 만드는 사람들의 비결을 장로님은 ‘순종’이라고 했다. 별로인 꿈을 주셔도 거기에 순종하는 것. 너무 똑똑한 사람은 따지는 게 많아서 안 된단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는 바보처럼 순종하는 거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면 너무 똑똑한 체하고 저울질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놓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작은 꿈이라 여기는 그것에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신다면 놀랍도록 크게 이루시니, 그행복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왜 꿈이 없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꿈은 너무 평범한 옷을 입고 우리 곁에 서 있다. 얼른 잡자. 기회는 앞머리만 있다고 했으니, 얼핏 보이더라도 얼른 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