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칼럼] 나에게 주는 상장한 학기를 마치며 수강생들에게 백지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의아해하는 수강생들에게 그 백지에 ‘나에게 주는 상장’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술렁이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들 당황하는 것 같았다. 조금 후에 한 수강생이 울먹이며 “눈물이 나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언젠가 “나는 나를 위해 살지 못한 것 같아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는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살았고, 결혼해서는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살았고,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살았어요”라고 했던 사람이다. 어떤 수강생은 탄식하듯 “내가 나를 칭찬하는 데 이렇게 인색할 줄 몰랐어요”라고 했다. 이 강의를 수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교회 사모들이다. 그녀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결혼 후 사모로 살면서 오십의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모도 있고, 시골 교회에서 온갖 험한 일을 도맡아서 했다는 사모도 있고, 탈출하고 싶어서 공부하러 온다는 사모도 있고, 암을 앓고 있는 사모도 있다. 그럼에도 자신을 칭찬하는 상장을 쓰라는 말에 선뜻 쓰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는 얼굴을 하고는 망연히 앉아 있거나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는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후 ‘나에게 주는 상장’을 큰 소리로 읽어보라고 했다. 상장을 읽어가는 그녀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서로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박수를 쳤다. 때로 인생의 한 시점을 보낼 때마다 지금까지의 세월을 덧없이 보낸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제대로 살지 못하고 보내는 것 같은 세월이 회한으로 남기도 한다. 칭찬 받을 것 없는 삶을 산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때 ‘나에게 주는 상장’을 써보자.‘잘 살았다. 여기까지 참 잘 왔다.’ 그렇게 나를 끌어안고 칭찬해주자.
-
[칼럼] 아침마다 새로운 삶삶의 무게를 느낄 때면 찾아가는 곳이 있다. 봄이면 노오란 산 수유 꽃이 마을을 뒤덮고 겨울이면 하얀 눈 밑에 빨간 산수유 열매가 아름다운 ‘이천 산수유 마을’이다. 그곳에 가면 숨이 제 대로 쉬어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너무 빨리 가는 내 시계가 숨을 고르고 여유를 부리는 것 같아서 좋다. 사슴을 키우는 소 박한 장로님과 권사님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권사님은 피곤을 몰고 가는 이 도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시간 을 내어주신다. 그 분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좋다. 대부분 은 집안 어른들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봇짐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객지를 떠돌며 예수님을 믿게 된 이 야기, 반대하는 집안 어른들 앞에서 예수님 못 믿게 하면 아예 죽어버리겠다고 해서 허락을 받은 이야기, 새파란 새색시였던 자신이 호랑이 나온다는 산을 넘어 십 리가 넘는 교회에 다녔 다는 이야기, 친정아버지는 성경을 읽으시다가 그 모습 그대로 천국에 가셨고 친정어머니는 목사님 무릎을 베고 주무시듯 천 국으로 가셨다는 이야기, 시아버님은 자신이 장가가시던 날, 색시와 초례상 앞에서 맞절하시던 그 시간에 환하게 웃으며 천국 으로 가셨는데 얼굴에 주름살이 다 펴져서 젊은이가 되어서 가 셨다는 이야기…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 지요.. ‘자식’이 장가를 가는 날..이 맞는 것인지요?) 그런 이야 기들을 들을 수 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복잡하고 군더더기 많은 내 신앙의 모습이 드러난다. 옛 어른들같이 단순하고 소박한 그런 신앙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신앙이란 잘 살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잘 죽으려고 믿는다는 것을 새삼 다지게 된다. 원 하는 것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아 본질을 잃은 신앙의 모습을 보게도 된다. 자신을 돌아보며 내 삶이 무겁고 골치 아픈 이유가 ‘오직 예수’ 라는 단순함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보아도 좋을 것 같 다. 그리고 후손에게 들려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내 신앙의 이 야기가 있을까 되돌아보는 지혜도 필요한 것 같다. 지난 시간 들의 무거움을 털어버리고, 붙잡지 말아야 했던 모든 줄들을 끊어 버리고 다시금 가볍게 출발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다시 살 수 있는 새 날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
[칼럼] 신정주의 목회 - "주도적 목회"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기관이다. 거룩한 신정주의를 이루는 곳이다. 주인이 하나님일 뿐 아니라 신정주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것을 만드는 곳이 바로 당회이다. 거룩하고 복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헌신하는 것이 당회원이다. 거룩한 신정 의회 의원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그런데 이 복된 자리에서 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정주의를 위한 훈련을 잘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정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우선 교회 중직자들에게 신정주의 훈련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 중직자들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헌신하느냐가 바른 신정주의 교회를 이루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먼저 참고로 신정주의를 위한 나의 목회 철학 가운데 “주도적 목회”를 소개한다. 목회자들이 주도권을 잃는 경우가 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중직자나 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목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목회자 개인을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 신정주의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담임목사가 영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이끌고 가야 한다. 이것은 한 개인의 뜻을 앞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모세, 다윗, 선지자, 사도 등과 같은 신정주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은 영권을 주시고 주도적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셨는데, 이는 온전한 신정주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현대 교회 또한 신정주의를 이루기 위해 담임목사가 주도적 목회를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목회작 인프라이다. 현대 사회는 그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다양하여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개인적인 발전과 도태의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때 신속성이 없이 그저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문제와 사안에 대해 끌려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담임목사가 신정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교회 안의 문제들에 대해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방어적 목회나 소극적인 대응 목회를 하고 있다면 신정주의를 성공할 수 없다. 현시대의 담임목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신정주의를 이루기 위해 성도들을 주도하고 시대와 문화를 주도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대응적, 방어적 목회를 해서는 실패한다.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이나 프로그램이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방치하다가는 큰 곤경을 당하는 일들이 가끔 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어떤 프로그램이나 새로운 체계를 도입할 때도 부교역자나 중직자들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가 중심에 서서 주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 보면, 그 첫 번째가 ‘주도적이 되어라’이다. 자기 스스로 문제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주도하고 이끌고 갔을 때 성공할 수 있다. 방어적이거나 수동적인 자세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어떤 문제가 압박해 올 때 주로 수동적으로 처리하려 한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처리하려 하지 않고 누군가를 시켜서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신정주의 교회를 회복해 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가 자신을 압박해 오기 전에 본인이 직접 나서서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갈등 해결을 이룰 수 있다. 신정주의의 훌륭한 지도자들이었던 모세와 다윗과 같은 사람을 보라. 그들은 늘 문제의 한복판에 서서 하나님과 의논하며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자기 스스로 역사와 개인의 삶 한가운데 주인공이 되었다. 엑스트라가 되어 비겁하게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처럼 교회의 교육, 행정, 심방,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이르기까지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과 뜻이 주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때 신정주의 교회를 회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