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김신성(시인) 여름 내내 뜨거웠던 가슴으로 한 줄 바람이 불어 온다 열병을 앓는 동안 가슴에 담은 기도가 익어가는 계절 태풍에 남겨진 열매들은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설익어 온전함을 향해 가는 9월이여 9월은 묵묵히 무르익음을 향해 가고 있다 이 가을엔 투명한 하늘빛 벗 삼아 좁은 길로 가야겠다 마음에 저 하늘빛 닮은 창문 걸어 놓고 구절초의 보랏빛 기도 들으며 가노라면 조금은 9월의 빛을 닮아가겠지 풋내 나던 과실들이 농익은 맛으...
김신성 사모(시인) 한번쯤은 이렇게 뜨거운 계절을 만나달궈진 길 위에 서보는 것도 좋으리라불같은 열기를 마시고헐떡거리며심장속에 숨어있던허영과 교만을 토해내어밀납처럼 말라 소멸되어 가는 것을 봐야한다 풀잎들은흔들리면서도 푸르른데나는뜨거운 햇빛 아래서비틀거리며 부서지는 질그릇임을알게 된다면겸손히 겸손히한 계절을 지나리라 박넝쿨의 그림자조차귀하고한 조각 구름이 실어온바람 한 줄이 고맙다폭염을 견뎌내는모든 생명이 위대하다는 것을가르쳐주고다시 소명을 깨워주는이 뜨거운 계절을사...
김신성 사모(시인) 창밖으로 보이는 묶은 밭에는 망초 꽃이 하얗게 피어났다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함을 아는 얼굴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얼굴은 소박한 미소처럼 평안하다 떠나간 사랑 잊기위해 서로가 얼싸안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게 외로움이라며 함께 무리지어 낮이나 밤이나 하얀 꽃동산 일군다 수수한 미소 뒤에는 척박한 땅위에서 사는게 만만치 않아 밤에도 깊은 잠 들지 못해 키만 멀대 처럼 키운 망촛대 그래도 한세상, 이왕이면 꽃은 피워...
김신성 사모(시인) 누구나 가슴에, 뜨거운 응어리 하나씩은 안고 살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듯 가슴에 품은 짙은 한숨은 애간장 녹이는 삶의 질고 아무리 지우려 해도 쏟아지는 햇살처럼 뜨거워 헉헉 거릴 때는 잠시 쉬어가야 한다 7월 폭염에 눈물조차 마른 굳은 땅 숙명처럼 뜨거운 응어리는 하늘을 달구고 열풍으로 대륙도 달군다 갈증의 절정 폭염의 절정 어느 날 하늘에서 해갈의 은총을 내려준다 타는 목마름위로 내리는 비는 뜨거운 가슴 ...
김신성 사모(시인) 너는 그토록 푸른 생명력으로 그토록 왕성한 번식을 하는데 어이해 지탱해 줄 기둥도 없이 넝쿨로 살아야 하는가? 염치없이 곁에 있는 나무를 휘휘감고 언덕에 앉아 있는 바위를 타오르며 끝없이 뻗어가는 푸른 힘 홀로는 설 수 없어 기대어 사는 삶 세월은 뿌리에 묻고 넝쿨로 누워 살아도 그래도 여름 숲속이 온통 칡꽃향기로 진동하는 이유는 오늘도 주어진 숙명의 시간을 올라가는 용기 때문이다.
김신성 사모(시인) 늘 오르지 못해 하는 내게 강물은 내려감을 보여준다 더 가지지 못해 하는 내게 강물은 나눠주며 흘러간다 늘 두리번 거리며 머물러 서는 내게 강물은 저만치서 손 흔든다 정박한 쪽배와 마주 누워 연정을 품고파도 머물지 않은 흐름 오로지 바다를 향한 해심(海心)하나로 그렇게 흐르며 마침내 바다가 된다
김신성 사모(시인) 풀 한 포기 뿌리 내린 곳은 외로운 들녘 밤새 내려앉는 이슬에 목축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욕심 없이 하루만 살겠노라 그렇게 마음 먹노라면 그 넓은 들녁이 얼마나 풍요롭던지··· 바람에 몸을 맡긴 들풀, 햇빛과 달빛 아래 가는 세월 보노라면 어느새 피어난 소박한 꽃들 오늘도 어김없이 들길 거닐던 착한 농부는 보일듯 말듯한 들꽃 앞에 앉아 예쁘다고, 예쁘다고··· 그 여린 꽃잎을 이고 들녘의 어둔밤을 홀로...
어머니 -송경복 사모- 팔십 오년 겹겹의 시간들 주린 보릿고개와 전쟁의 회오리 거칠고 험한 언덕을 맨발로 걸어오신 내 어머니 줄줄이 낳은 딸 다섯 스스로 죄인 되어 쏟아야 했던 눈물 앙상히 말라 버린 젖무덤 사이로 바람만 훑고 계신 어머니 마디마디 갈퀴가 된 손가락 무릎은 낙타가 되니 예비하신 짝 만나 가정 이루는구나. 짙게 들여진 노을빛에 한 땀 한 땀 육남매 얼굴 수놓고 고단했던 하루가 쉼을 만난다. 내...
김신성 사모 (시인) '많이 먹거라, 키가 크니 배도 쉬 고프지' 큰 키까지 애달파했던 엄마 고만 고만, 무거워 엄마, 가락시장에서 다 살 수 있어 '그래도 그래도' 봉다리 봉다리 싸 들고 해지는 동구밖까지 따라오시던 그 엄마는 꿈길만을 밟고 오신다 엄마 이제는 용돈도 드릴 수 있는데 해외여행도 보내 드릴 수 있는데 번듯한 투피스도 사드릴 수 있는데 이 한 송이 종이꽃조차 꽂아드릴 수 없는 꿈길 위에만 서 계신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