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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설교] 하나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디모데전서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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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설교] 하나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디모데전서 4:4-5)

황형택 목사(강북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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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 4:4-5)
 
옛사람은 두 가지 종류의 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눈이라고 말하는 외안과 다른 하나는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는 내안입니다. 육체의 눈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지만, 그 사물 속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보는 이치를 이해하려면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외안으로만 보면 번듯한 겉모양에 때때로 현혹되어 덥석 선택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외안과 내안이 상충될 때 안을 볼 수 있는 내안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내안을 가리켜 영적인 눈, ‘영안’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시편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깊은 곳에 담긴 그 무엇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방법으로 사물을 읽어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실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볼 수 있을지 말씀을 통해 확인해보려 합니다.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
 
4절 상반절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두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 부분이 “모든 것이 지어졌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볼 때 하나님의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었다면 내가 분석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풀어야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려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 이 사실이 명쾌하게 드러납니다. 요셉이 자신의 삶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방식대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요셉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시기와 오해 때문에 팔려가는 인생과 감옥에 갇힌 신세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잘 되는 일에도, 안 되는 일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순간을 선으로 바꿔주신다.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또 다른 시각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4절 상반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지금 당장은 현혹될 만큼 어렵고, 삶을 포기해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일지 모르지만 반드시 선하게 만들어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죽자 장례를 치른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보복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해하려고 했던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바꾸셔서 많은 백성들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그것이 고통이나 실패여도 꼭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슬픔의 노래를 불렀던 예레미야는 눈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 3:32-33)”
 
지금은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좋은 것입니다. 주의 은혜와 긍휼을 따라 하나님께서 좋은 것들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모두 사연이 있습니다. 남들이 모르는 사연입니다. 그래서 그 사연을 모를 때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알고 나서야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중년의 부부가 기차를 탔습니다. 남자가 창밖을 보고 어린애마냥 “우와, 저 푸른 들판 좀 봐.”라고 말했습니다. 기차 칸에 있던 사람들은 의외의 표정으로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부인이 “그렇죠. 당신 정말 잘 보았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남자는 쉬지 않고 바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와, 태양이 너무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어. 어쩜 저렇게 구름이 하얗지? 하늘은 저렇게 파랗고!” 기차 안에 있던 한 사람이 한 마디 던집니다.

“저 남자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그 소리를 들은 부인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사실, 제 남편은 어린 시절에 사고로 시력을 잃었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각막을 기증받아 이식 수술을 하고 오늘 퇴원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경이로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사연을 알고 나면 그 사람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연도 알고 나면, 하나님께서 왜 이 일을 하셨는지 이해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고통의 순간을 주시고, 쑥과 담즙 같은 인생의 쓴 시간을 보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연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안다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선하다 믿는 삶은 감사로 이어진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살아갈 때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4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모든 사건이 선하게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그 다음이 감사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면 감사하는 인생이 됩니다.

사람들은 감사의 조건을 정해 놓습니다. 예를 들어, 승진되기를 바라는 조건을 걸어 승진이 될 때 감사합니다. 학업이든 취업이는 원하는 곳으로부터 합격 통지서를 받을 때 감사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세운 조건에 미치지 못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조건의 틀을 만들어놓고 감사하려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그 지으신 모든 일이 반드시 선한 결과를 낳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감사의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송익필 학자가 쓴 〈족부족 : 넉넉하든지 부족하든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군자는 어찌하여 늘 만족하며, 소인은 어찌하여 늘 부족한가. 부족해도 만족하면 늘 남음이 있고, 족한데도 부족하다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여유로움을 즐기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 부족함을 근심하면 언제나 만족할까.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 밖에 있는 것을 구하면 어찌 능히 만족하리요.”

군자는 늘 족하다 생각하고 소인배들은 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는데,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족하고, 내게 없는 것을 구하면 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건강해서 예배드리러 나올 수 있고, 살기는 참 힘들었지만 굶지 않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이를 보면서 내게 왜 이것이 없고, 저것이 없지, 라고 밖에서 찾으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4절 말씀 하반절을 읽으면서 왜 구태여 “받으면”이라는 단어를 넣어놓았을까, 라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사실 ‘받으면’이라는 단어가 없어도 읽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읽어보면, ‘감사하면’보다 ‘감사함으로 받으면’이라는 말이 우리의 태도에 있어 강조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받는다”는 ‘선택하다’, ‘선택해서 강하게 붙잡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상황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원망하거나 억울해하며 받든지 아니면 감사함과 기쁨으로 받든지 수많은 가능성 중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강력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감사함을 강력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욥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아내가 그런 하나님일 것 같으면 나는 저주하고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욥 2:10)”

여기에 “받았다”는 히브리어로 ‘카발’입니다. ‘환경적으로는 거절하고 싶지만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상황으로는 받고 싶지 않은데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헬라어로 번역되면 디모데전서의 말씀의 ‘받으면’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십시오’라고 했던 겟세마네의 그 고백도 받는 것입니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면 어떤 사건도 버릴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것이 우리에게 우리 삶을 무너뜨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저주 같지만, 그것이 다 유익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세 사람이 걸어가게 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을 걸어가는 동안 주변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보면 그 삶을 따라가면서 스승으로 삼고, 좋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배워서 스승으로 삼기에 어떤 사람이든 스승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일어난 모든 일에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는 나의 스승이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가 필요하다.
 
이런 안목과 태도를 취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5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결국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일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하면 능력이 생깁니다. 그 능력이 생기면 세상에 수많은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을 볼 때에도 감사함으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말씀을 곱씹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그 기도가 되면 세상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이 버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그 수많은 사건을 말씀과 기도로 만나면 그 사건들이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깨끗하게 하는 것은 거룩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 모든 사건이 거룩한 사건이 됩니다. 거룩한 사건이 되면 주인의 쓰임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많은 사건이 우리의 기도와 말씀을 붙드는 삶을 통해 거룩해지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도 전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는 것이 절대로 어리석은 일이나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모자란 식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면 모든 사건이 거룩하게 바뀌고, 그것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멋진 일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기 위해 새로운 마음을 다시 잡아보는 설날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사건을 마주하여 감사함으로 받아 거룩한 사건이 넘치는 2021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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