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5 (일)

? Operation now in progress (115)
n
여자목사 안수문제에 대하여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설교⦁칼럼⦁시

여자목사 안수문제에 대하여

그동안 한국교회의 각 교단에서 심도있게 다뤄온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있다고 생각되어 여자목사 안수에 대한 진정한 하나님에 뜻을 찾아보고자 한다.

 

여자목사 안수문제에 대한 하나님에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성경은 분명히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치지도 말고 잠잠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현시대에 적용한다면 여자목사 안수는 성경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죄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바른 해석이 필요하다. 특히 성경은 저자가 성령님이시기에 성령님에 조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기독교 역사에 많은 혼란과 실패는 바로 성령에 조명이 없는 문자적인 해석에서 기인한 이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받은 이 말씀은 하나님에 명령인가

 

바울은 성경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고전 7:6)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바울이 받은 하나님 말씀은 ‘명령’과 ‘권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둘은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그랜드 종합주석을 참고한 결과 ‘명령’은 어느 시대에나 절대적으로 순종해야하는 불변의 하나님에 법이며, ‘권도’는 바울 자신에 개인적인 견해로 시대에 따라 변하는 현실에 적용하는 규범으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권도는 절대적인 하나님 명령이 아니라 시대를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권도’를 구분 못해 큰 오류에 빠졌던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유대인들에 구원관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구원받은 하나님에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개라고 했으니 말이다.

 

또한 예수님까지도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 또한 그 시대의 시대 상황을 고려한 ‘권도’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의 기도를 그 자리에서 응답하셨고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노라”고 까지 하시며 그의 믿음을 소위 하나님에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믿음보다 높이 평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절대적인 자신들만이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믿는 그들에게는 그들의 수준에 맞게  눈높이를 맞추신 듯 보인다. 그것이 바로 ‘권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도 ‘명령’과 ‘권도’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여자의 가르침 규제는 하나님에 ‘명령’인가 ‘권도’인가? 

 

딤전2:12“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것은 분명히 명령이 아닌 권도이다. 그 증거는 성경을 기록한 성령님 자신이 여자에게도 가르치는 지혜의 말씀은사와 지식의 말씀은사를 주시기 때문이다. 이 은사를 주셨다는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명령’이라면 성령님 자신이 자신의 법을 어기는 모순이 되는 것이다. 또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도 금하신 듯 보이지만 영적인 세계에서의 우열은 결코 직분도 성별도 아니다. 

 

그것은 성령님께 얼마나 쓰임 받느냐에 달렸다 . 그 증거로 사도행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분명 아굴라가 남편임에도 여자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성경에서 이름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복음 동역자지만 사도행전 13장 이전엔 ‘바나바와바울’로 성경에 기록되지만 바울이 성령충만하여 바예수라는 거짓 된 자를 굴복시킨 사건이후로부터 바나바에서 바울로 주도권이 바뀌어 ‘바울과 바나바’로 기록 순서가 바뀐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바나바를 주관하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을 비교해 볼 때 쉽게 납득이 안 가는 것은 바울이 누구인가? 얼마 전만 해도 십자가의  원수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원수였다. 그런 반면에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가장 신실하고 모범된 종으로서 바울을 바울되게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바울의 신앙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결코 바나바보다 앞설 수 없다. 그러나 성령님이 바울을 주도하니까 바나바까지도 주도하는 주도자가 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여자가 성령의 주도자가 되니까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다.

 

사사기에 사사 드보라는 여자임에도 그 당시에 군대사령관인 바락을 주관할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주관하는 사사직분을 감당했다. 사사시대의 사사는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성령님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에 신이 임해야 사사다.

 

주관자는 성령충만하면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주관 하는 것’을 금한 것도 ‘명령’이 아닌 ‘권도’이다. 그것이 ‘명령’이라면 성령님 자신이 또다시 자신에 법을 어긴 격이 되는 것이다.


왜 성경에 여자가 가르치고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했을까?

 

성경에 증거가 있듯이 그 시대는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은 듯하다. 오병이어의 기적에도 먹은 사람은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했다. 그 이전 구약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출애굽 숫자를 남자만 육십만으로 기록한다. 이스라엘의 여자에 대한 차별이 이렇게 심한 시대에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두고 교회에서 남자 위에 세우고 남자를 가르친다는 것은 도저히 그 시대가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시대에 여자를 제한하지 않으면 복음의 길을 막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럴진대 여자를 교회에서 활동하게 한다는 것은 그들의 눈에 기독교를 미친 집단으로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시대에 국한해서 ‘권도’한 것이지 모든 시대에 ‘명령’으로 준 것이 아니다.


그러면 여자목사 안수문제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그 방법 또한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여자목사 안수문제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볼 때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하는가에 대한 유대인들의 갈등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에 강력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사도들까지도 이 문제를 쉽게 납득하지 않았고 갈등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주심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은 당연하다. 이스라엘만이 선택받은 하나님에 백성이라는 사상이 어릴 때부터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남자만이 목회할 수 있다는 우리의 입장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그들은 그런 와중에 어떻게 하나님에 뜻을 정확하게 분별해서 결정했는가를 보면  우리의 여자목사 안수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사도행전 11장에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당시의 예루살렘 총회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그중에는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이르되” (행11:1-4)

 

이것이 당시의 성령충만 받은 초대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대한 태도였고 갈등이었다.

 

우리가 여자목사 안수문제로 갈등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에 뜻을 확신하고 결정했는가가 곧 우리의 갈등을 그치게 할 수 있는 해답이 되는 것이다.

 

갈등하는 그들에게 베드로는 고넬료에 집에 가게 된 동기를 간증형식으로 그들에게 말한다.

 

기도하는 중에 환상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온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을 듣고 부정한 것들이라서 거부했더니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부정하다하지 말라 잡아먹으라”

 

하셨고, 또한 하나님은 고넬료에게는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집으로 초청하게 하셔서 생면부지의 두 사람을 극적으로 만나게 하셨음을 간증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베드로에게 환상을 통해 알려 주셨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그의 환상내용을 하나님에 말씀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고넬료는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에 뜻을 알려주셨다. 왜 다른가? 그것은 성령님과 관계가 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았고,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해서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을 받는다. 성령하나님에 계시 방법은 꿈과 환상과 예언이다.(행2:17) 그러므로 계시 방법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해답을 찾아야한다고 본다. 예루살렘교회가 베드로의 환상을 하나님에 말씀으로 인정한 것처럼, 우리도 여자목회자들의 소명간증을 들어야 한다. 그것은 거의 꿈과 환상과 예언으로 부르신다. 무조건 배척은 바리새인의 망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열매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베드로는 간증을  통해 이것을 증거한다. 자신이 그런 과정을 통해 고넬료의 집에가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듣는 고넬료와 온가족들 위에 성령이 임하셨음을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15)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7)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자신들에게 임한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같았다는 말이다.

 

베드로의 간증이 끝나자 예루살렘 총회가 보인 태도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예루살렘총회는 결국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간증 앞에 자신들의 잘못된 사고를 다 내려놓았다. 이것이 하나님에 자녀들이 보여 주야 할 바른 태도이다.

 

우리는 여자 목회자들을 통해 그들이 목회하는 그들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증거가 있고 열매가 있다면 순복해야 한다. 그것을 규제하는 것은 하나님에 뜻을 거역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것으로 결코 하나님에 축복이 없고 장래도 없다. 초대교회나 베드로는 성령하나님께 촛점을 맞췄다. 그 성령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시기에 그 뜻을 존중하고 그 뜻에 굴복한 것이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시대에 살고 있다. 예루살렘총회가 비록 개인에 불과한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성령 하나님에 역사하심 앞에 순순히 따른 것처럼 한국교회의 각 교단도 여자 목회자들을 모셔서 그들 통해 일어난 성령의 역사와 열매들을 들어보고 성령의 역사가 확실하다면 순순히 따라야 한다. 또한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목회하는 여자 목사들의 교회에서 일어난 열매와 성령의 역사 앞에 순복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초대교회의 방법이었다.

 

원주강성침례교회 노성철 목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